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 배려심 많은 서모, 재주를 숨길 줄 아는아이 이성계는 서모 김 씨와 두 명의 이복형제와도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실록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처음에 환조(이자춘)가 세상을 떠나시니, 태조가 정안옹주 김 씨를 맞이하여 서울의 집으로 와서 그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특히이성계, 이방원, 세종대왕에 비해 원경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이 없다.
빈 부분을 창조해야 했고, 제가 느낀 감정과 연기로 채워 넣어야 했다.
(웃음) 꼬맹이 엄마로 시작했다가아이를 잃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을 넘어 위대한 세종대왕을 키워낸 어머니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체감했다.
나는 결혼을 안 해봐서아이들을 귀여워하기만 했는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을 키워낸 어머니로서 고민해야 했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또 원경은이성계, 이방원, 세종대왕과 달리 알려진 게 많이 없는 인물이라 비워진 것들은 제가 채워 넣어야 했다.
큰 줄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
원경왕후의 어떤 면을 부각해서 보여주고자 했냐는 물음에는 "5회에서 원경이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영실에게 ‘너를 살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너.
그러면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방원은, 아버지이성계가 건강을 염려했을 정도로 약했고, 전해지는 모습은 선이 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원경은 "성녕을 낳고 전 하늘이 전하와 저를 갈라놓지 않기 위해 이아이를 보내줬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상왕(태조이성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디 그 천명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십시오"라고 설득했다.
양녕은 이후 자리를 떠났고, 이방원은 밤하늘을 보며.
기득권을 잘라내는 데, 그 시작은 중전을 비롯한 그 일가일 것이란 아버지이성계(이성민)와의 약조를 가슴에 품은 이방원에게 원경은 “늘 그랬듯 제가.
“살을 섞고아이를 낳고 많은 것을 함께 겪어낸 부부에게 절대 끊어내지 못하는 그 무엇”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을 터.
뿐만 아니라 원경과 이방원 사이엔.
기득권을 잘라내는 데, 그 시작은 중전을 비롯한 그 일가일 것이란 아버지이성계(이성민)와의 약조를 가슴에 품은 이방원에게 원경은 “늘 그랬듯 제가.
“살을 섞고아이를 낳고 많은 것을 함께 겪어낸 부부에게 절대 끊어내지 못하는 그 무엇”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을 터.
뿐만 아니라 원경과 이방원 사이엔.
태조이성계의 셋째 아들인 익안대군의 초상화가 거실 벽 가장 높은 자리에 걸려 있는 이곳은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21대손 이세희 씨(71)가 사는.
5년 전 송동마을에 입주한 양모 씨(46)는 “직장에서 30분 정도 거리이고 환경도 좋은 전원주택에서아이를 키우고 싶어 이곳을 선택했다”며 “나라에서 주는.
나중에 알아본 결과 태조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 왔다”고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수철리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뿌연 하게 밝아 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인정 욕구에 목말라 한다.
심지어이성계는 이방원을 죽이려고 하면서 “너는 왜 왕이 되었냐, 누대에 걸친 재상 집안에 봉사하기 위해 선택되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나, ‘왕권 강화’의 화신으로 알려진 이방원에게 이처럼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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